Роман Ким – корейский ниндзя советской истории. Vol.1

소련 역사에 등장한 한인 닌자, 로만 김

2017년 4월 25일 알렉산드르 쿨라노프, RUSSIA포커스 특별기고

정확히 1년 전 2016년 4월 전기 도서 시리즈 ‘주목할 만한 사람들의 생애’를 통해 알렉산드르 쿨라노프의 책 ‘로만 김’이 출판됐다. 그로부터 한 달 뒤 5월에는 이 책의 저자가 로만 김의 운명과 창작 유산을 조명하는 국제학술회의를 사상 처음으로 개최했다. Russia포커스가 소련의 가장 신비로운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로만 김의 생애를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한다.

전후 시대의 저명한 소련 작가 로만 김은 정확히 알려진 게 거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훗날 소련 ‘첩보 소설’ 장르의 창시자가 되는 로만 김을 만났다는 것을 한 일본 첩보요원이 뒤늦게 깨닫고는 할복했을 만큼 일본 첩보기관에 커다란 공포를 일으켰던 한인이다.

로만 김은 자신의 출신에 관해 말하기를 좋아했는데, 이 이야기들은 너무나 놀라워서 지금까지도 많은 이에게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는 자기 어머니 나데즈다 민이 1895년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자매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김병학이었는데, 과거 조선 탁지부의 관리였다가 아내와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와 그곳에서 존경 받는 상인 니콜라이 김이 됐다. 일본 역사학자들은 니콜라이 김을 연해주 반일 지하조직의 최고 재정지원가라 주장하며, 그의 아들 로만은 아버지가 이러한 자격으로 여러 차례 안중근 의사를 집에서 대접했으며 1909년 10월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 연회를 열었다고 썼다.

그러나 1899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난 로만 김 자신은 그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로만이 7살 때 그를 일본으로 유학보냈기 때문이다. ‘적을 안에서부터 연구해’ 식민주의자들에게 철저히 대비하고 비밀스러우면서도 가장 위험한 적이 되기 위해서였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생각의 실현을 도운 사람은 연해주에서 가장 큰 한인 상인인 아버지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블라디보스토크의 일본 첩보기관 고정간첩들이었다. 그래서 로만이 도쿄로 떠난 것에 대해 일본 외무성 장관이 직접 통지를 받았다.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했다. 도쿄에서 소년은 일류 게이오 대학에 입학했으나 학업을 마치지는 못했다. 동급생의 회상에 따르면, 로만은 스기우라 킨고라는 이름을 썼고 일본 황태자의 스승이자 일본 국수주의 사상가 중 하나인 스기우라 쥬고 일가에서 양육됐다. 청년 킨고는 스승의 딸과 사랑에 빠져 아버지에게 결혼 허락을 요청했다. 김병학은 ‘분노로 타올라’ 즉시 아들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불러들였고 그후 다시는 도쿄로 보내지 않았다. 여기서 청년은 다시 로만 김이 돼 시험을 거쳐 김나지야를 졸업하고 1922년에는 동방대학도 졸업했는데, 우수한 성적을 거둬 일본학부 강사로 남으라는 제안을 받았다. 김은 거절했다. 그의 일본인 스승의 다른 제자가 차기 천황 쇼와(히로히토)로 선언됐을 무렵, 로만은 ‘마르텐’이라는 이름으로 소련의 비밀 경찰인 연해주 국가정치국의 비밀요원이 됐다.

40년 후 존경 받는 추리 소설가가 된 로만 김은 신인 작가 율리안 세묘노프에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신이 한 일에 관해 말해준다. 율리안 세묘노프는 나중에 소련 ‘첩보 장르’의 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가 돼 소련 첩보요원 이사예프-시티를리츠의 모험에 관한 컬트 시리즈의 제1권 ‘암호는 필요없다(Пароль не нужен)’를 쓰게 된다. 김-마르텐은 이 책에서 ‘첸-마레이키스’라는 이름으로 사진처럼 정확하게 묘사된다. 세묘노프는 나이 든 동지가 사망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만 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책이 쓰여질 것이며 영화가 나올 것이다…”

로만 김이 일본인 틈에서 성공적으로 일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일본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스기우라 일가에 양육됐던 일 만은 아니다. 1920년 4월 그는 일본 헌병들에 의해 총살당할 뻔 했다. 열차 수색 중 로만에게서 한인 지하조직 자료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를 적군에 공감한 일본 기자 오타케가 구했다. 오타케가 김이 일본인이며 “내 비서”라고 하자 풀어줄 수 밖에 없었다. 로만은 실제로 오타케의 비서가 됐고 그와 함께 1923년 모스크바로 떠나는데, 당시 오타케는 일본 정부의 비밀 임무를 갖고 소련의 수도로 향한 것이었다. 물론 이 임무에 관한 모든 것은 즉각 크렘린궁에 알려졌다[Office4][K5]. 오타케는 자기 비서에게 비밀이 없었고, ‘마르텐’ 요원은 자신의 체키스트(첩보원) 임무에 큰 열정을 갖고 있었다. 일본 밀사가 쓴 모든 글은 김에 의해 루뱐카(국가안보기관)에 전달됐다. 1926년 오타케는 도쿄로 돌아갔고, 김은 동양학연구소와 군사아카데미의 교수로, 그리고 물론 ‘마르텐’ 요원으로 러시아에 남았다.

그의 이후 경력은 할리우드 영화 같은 비현실성으로 충격을 준다. 1927년 김은 크림의 일본 잠수탐험대에서 통역사로 일하고, 통합국가정치국은 일본의 잠수분야 최신 개발품들을 받는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암호문제를 전담하는 통합국가정치국 특수부에 임시 파견되는데, 같은 해 체키스트들은 일본 군 암호와 외교 암호를 뚫는다.

그러나 ‘마르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일본 대사관 무관부 금고 기밀문서 제거 전문가’라는 직무 특성에 반영돼 있다. 김은 여성요원망을 통해 모스크바에서 일하는 일본 첩보원들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내고, 핵심적으로는 그들의 금고 열쇠 및 봉인의 복제품을 입수했다. 김은 밤마다 일본대사관 건물에 침투해 기밀문서들의 사진을 찍고 훔쳐낸 자료들(단 한 부만 만들어진 속필도 종종 있었음)을 성공적으로 러시아어로 번역하기 위해 밤중에 사라졌다.

일본인들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챘다. 무관 하타 중령은 심지어 부하에게 ‘여자들을 조심하라!’라는 특별 지시를 했는데 그 기록도 김은 훔쳐냈다. 1932년 겨울 소련과 일본이 전쟁 직전에 있었을 때, 스탈린은 일본 대사관에서 있었던 회의의 비밀의사록 일부를 ‘이즈베스티야’ 신문에 발표하도록 명령했는데, 회의에는 대사를 포함해 총 3인이 참석했고 소련 공격에 관한 논의가 이뤄졌다. 이에 전쟁을 막을 수 있었고, ‘마르텐’ 요원은 통합국가정치국의 정규요원이 됐으며 포상으로 개인 무기를 지급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아들이 태어나자 김은 ‘비바트(vivat: 만세)’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미국의 소련 특수기관 역사학자 히로아키 쿠로미야 교수는 로만 김을 1939년 적군의 할힌골 전투 승리의 주요 영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교수는 1920년대 말 모스크바에서 복무했던 일본군 지휘관 고마쓰바라 장군이 통합국가정치국에 포섭돼 일부러 몽골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본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고마쓰바라와 하타가 통합국가정치국 및 군사첩보기관의 대대적인 일본 총사령부 허위정보 작전의 희생자가 됐다는 것은 알려졌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의심을 가졌던 해군무관 고야나기 대위는 김 때문에 집무실에서 할복하고 말았다.

할힌골 전투 즈음 로만 김은 일본을 위해 간첩 행위를 했다는 날조된 혐의로 체포돼 이미 루뱐카 감옥에 수감돼 있었다. 1937-38년에는 아주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전문가가 거짓 혐의로 투옥됐다. 당시에는 거리에서 외국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투옥되거나 총살형을 당하기에 충분했다. 외국에 나가 첩보 활동을 펼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그런 이유로 투옥되거나 총살의 운명을 맞이했다. 외국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사람은 곧 간첩이나 다름없었다! 이 밖에도 ‘조국의 배신자 집안 사람들’과 관련한 내무인민위원회의 특별 지시도 존재했다. 이 지시에 따라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 쓴 사람들의 아내도 체포됐고 그들의 자녀들은 선별돼 내무인민위원회 산하 고아원으로 넘겨졌다. 만약 누군가가 즉각 총살을 면하고 나중에 전문가로서 자신의 쓸모를 입증할 수 있었다면, 그런 사람들은 장기 수감되어 감옥에서 자기에 맞는 일을 계속했다(예를 들면, 항공기 설계사 안드레이 투폴레프나 소련 우주산업의 창시자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은 업무상 필요하다면 심지어 외국 출장도 다녀왔다. 물론, 안전요원이 동행했다.

로만 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입심이 좋은 그는 구제될 기회가 거의 없을 것 같던 감옥에서조차도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그는 일본 첩보기관을 상대로 자기가 벌였던 일에 관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지어내 수사관들을 속였고, 수사를 지연시켜 스탈린 까지 관심을 갖게 만들 수 있었다. 심리가 끝났을 때 생명을 걸어야 하는 위험은 지나가 있었다. 김은 20년 형을 받고 감옥에 있어야 했지만 여전히 대일본 작전을 했고 때로는 감방에서 바로 외국 출장을 나가기도 했다. 몇몇 임무는 오직 그, 로만 김만이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공로는 묻히지 않았다. 1943년에는 투옥돼 있던 아내도 빼내는 데 성공하고, 1945년 일본과의 전쟁이 시작됐을 때 수감자였던 김은 비밀임무를 띠고 극동으로 떠났다. 그가 돌아오자 예전 판결이 재고됐다. 일본과의 전쟁 중에 그는 심지어 수감된 상태에서도 일본에 대한 방첩 활동을 아주 잘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그는 비공식 사면을 받아 석방됐다. 1945년 12월 29일 모스크바 일본 첩보기관의 가장 무서운 적이었던 김은 자유의 몸이 돼 ‘일본에 대한 승리’의 공로로 메달을 받았으며 다른 신분, 첩보추리소설 장르의 거장으로서 싸움을 계속했다. 2부에 계속… >> 러시아에서 처형당한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 김 알렉산드라
출처: Russia포커스 – https://russiafocus.co.kr/opinion/2017/04/25/soryeon-yeogsae-deungjanghan-hanin-ninja-roman-gim_749531